Linguistics/Indo-European

중세 필사본 읽기 가이드 01 - 시대별로 사용된 라틴 필사본 서체

冥人 2025. 12. 20. 02:17

Master of the Brussels Initials – MS. 34, f. 172a /14-15세기

 

지금처럼 인쇄기가 상용화되기 이전의 중세 유럽에서는 기록을 남길 때 필경사가 직접 손으로 글을 적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이 시기에 사용된 양피지는 오늘날의 종이보다 훨씬 비쌌기 때문에 한정된 범위에서만 생산되었다.

 

비싼 양피지, 필경사의 정성스러운 글씨, 화려한 금박과 일러스트가 더해진 필사본(Manuscript)은 중세 예술을 대표하며, 성경을 비롯한 각종 학술 기록들이 포함되어 학문의 가치를 보존하고 후대에 전파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삽화와 금박까지 화려하게 덧칠되어 있는 경우를 따로 채식필사본이라 부른다.) 특히 이미 멸망한 고대 로마의 고전 문학을 실전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중세 수도원 필경사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값이 비싸고 양산하기 어려운 만큼 보존력이 뛰어난 양피지를 활용한 필사본들은 오늘날에도 그 형태를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으며, 그 수량도 매우 많다. 그래서 중세 라틴어를 비롯한 이 시기의 언어나 문화, 역사 등을 자세히 알고 싶다면 원전 사료를 읽는 것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이다.

 

필경사가 책상에 앉아 필사본을 적는 모습. (NLW MS 5016D, f.28r /14세기)

 

하지만 사람의 손으로 직접 필사한 것이기 때문에 필경사마다 쓰는 스타일이 다르고, 줄 간격이 생략된 경우도 많으며, 지역과 시기별로 철자법이 달라서 읽는 것이 매우 어려울 수 있다.

 

검은색 박스로 쳐져 있는 이 단어는 conuenienti('모이는', '일치하는')를 뜻한다. 이런 식으로 합자 형태로 붙어 있는 경우가 많아서 읽는 연습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줄을 맞추기 위해 약어를 쓰거나, 'i', 'u', 'v', 'n', 'm' 같은 글자들이 모두 똑같은 수직선으로 그려진 것처럼 보일 수 있으며, 두 글자를 하나로 쓰는 합자 형태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이런 이유로 현대 텍스트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가독성이 떨어질 수 있다. 무엇보다 약어 규칙을 알아야 하는데, 예를 들어 "Non bis in idem"과 같은 구절이 필사본에서는 "No b i id"처럼 생략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는 값비싼 양피지를 극한으로 활용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필사본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그 방법을 따로 배워두는 것이 좋다. 일단 각 시대별로 어떤 글씨체가 필사본에 반영되었는지를 대략적으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번 장에서는 이와 관련된 내용만 적어보도록 한다.

 

[언셜체/Uncial script]

 

엄밀히 말하자면, 이 글씨체는 로마 제국 말기부터 중세 초반(4~8세기)까지 필사본에 사용되었지만, 아무튼 중세 초기에도 사용되었으니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겠다. 라틴어 외에도 그리스어/고트어 등 여러 언어에서도 활용되었던 언셜체는 대문자로만 표기되어 있고, 후기 로마자 필기체에서 발전된 형태로 추측되고 있다. 

 

켈스의 서(Codex Cenannensis / 9세기)

 

언셜체의 특징으로는 넉넉하고 둥글둥글한 외형이다. 성경 필사본 등 기독교 서적에 광범위하게 활용되었으며, 우아하면서도 강조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여 성경의 권위를 내세우기에도 적합했던 글꼴이기도 하다.

 

언셜체는 우리가 대문자로 간주하는 문자 형태(B, N, R, S 등)와 우리의 소문자 알파벳에서 볼 수 있는 형태(d, e, h, m, u 등)가 혼합되어 있다. (A는 그 중간쯤에 위치하는데, 대문자 A의 똑바로 선 삼각형 형태를 띠면서도 왼쪽 다리 부분은 고리 모양으로 되어 있다. 이 고리 모양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인쇄용 소문자 a의 기원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는 이 서체를 대문자 서체(majuscule)로 분류한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글자가 마치 두 개의 가상의 선 사이에 쓰인 것처럼 높이가 일정하기 때문이며, 단지 몇몇 글자만이 선 위로 조금 솟아오르거나 아래로 조금 내려올 뿐이다.

 

이 언셜체도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게 변형되어서 사용되었고, 반언설체(half-uncial)라는 압축된 형태가 등장하기도 했다. 특히 어센더(ascenders, 가상선 위로 뻗은 선)와 디센더(descenders, 아래로 처진 선)이라는 개념이 등장하였으며, 그 뒤를 이어 기본 획을 쓸 때 도구(펜)를 비트는 기법이나 획을 겹쳐 쓰는 방식이 발전되었다.

 

[인슐라체/Insular script]

 

Cotton Nero D IV, f. 34r. / 8세기

 

Insular는 섬을 뜻하는데, 말 그대로 아일랜드나 영국(잉글랜드)과 같은 섬나라에서 주로 활용된 서체를 말한다. 라틴어는 물론, 고대 아일랜드어, 고대 영어 등 자국어를 옮겨 적는 등 활발하게 사용되어 왔다. (대략 7세기부터 9세기 중반까지) 

 

이 시기의 아일랜드(남서부 스코틀랜드/아일랜드 일부를 포함)와 잉글랜드 모두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면서 라틴 문자와 라틴어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로 인해 이 섬나라에서도 다양한 라틴어 서적이 필사되었고, 이 인슐라체는 앞서 설명한 언셜 혹은 반언셜체의 영향을 받아 자신들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발전된 모습을 보여줬다. 위 사진은 기존의 인슐라체에서 더 발전한 인슐라 반언설체(Insular Half-Uncial)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카롤링거 소문자/Carolingian minuscule]

 

Gallen, Stiftsbibliothek, Cod. Sang. 116 . p.3 / 9세기

 

9세기 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시대로 흘러가면서 '카롤링거 소문자(Carolingian minuscule)' 라는 역대급으로 중요한 변화가 발생하게 된다. 카롤루스 대제의 주도 하에 여러 수도원과 학자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이 카롤링거 소문자는 명확하고 통일되며 일관된 서적 복제 방식을 만들려는 전반적인 노력의 일환으로, 중세 유럽 시기에 서예적 표준으로 개발된 서체를 말한다. 이는 로마 후기의 공문서 서체로부터 파생되었지만,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을 가진 기존 서체들에 일관성과 명확성을 부여하기 위한 노력에 해당되었다.

 

카롤링거 소문자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카롤링거 소문자의 특징으로는 글자 사이 및 단어 사이의 간격을 명확하게 두어 가독성을 높였고, 특정 알파벳의 형태를 통일하여 일관성있게 만들었다. 수많은 학자들의 노력 끝에 만들어진 이 명확하고 읽기 좋은 서체는 제국 전체 내부에서 동일한 교리와 전례를 공유하도록 표준 성경 제작에 활용되기도 했으며, 이 서체는 훗날 르네상스 시대에 부활하여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영문 소문자 인쇄체의 모태가 되었다.

 

[서고트체/Visigothic script]

 

Silos Apocalypse - Add. MS 11695, f. 194r. / 11~12세기

 

13세기까지 쓰인 서고트체(Visigothic script)는 히스파니아(이베리아 반도)에서 발생한 서체로, 서고트족이 지배한 스페인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서고트족하고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당시 중세 스페인 내에서 쓰이기는 했으나 점차 카롤링거 소문자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외형 자체는 다른 초기 중세 소문자들과 공통 요소가 많은데, 일단 m이나 n처럼 짧은 선으로 구성된 글자의 높이가 낮고, 어센더와 디센더가 수직으로 길게 뻗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미적인 느낌을 주는 것 말고도 특정 발음을 표현하기 위해 단어와 특정 위치에서 특수한 형태의 합자와 개별 문자들을 활용하고 있어 해당 서체로 된 문서를 읽을 때는 이것도 따로 학습해야 한다.

 

[베네벤토체/Beneventan script]

 

Add. MS 30337, f. 8r. / 11세기

 

8-13세기 이탈리아 남부의 베네벤토 공국에서 유래한 서체다. 이 서체는 부러진 미님(minim)이 특징으로, 모든 서체에서 글자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인 수직 획이, 베네벤토 서체에서는 가운데 지점에서 맞닿는 두 개의 짧고 넓은 대각선 획으로 이루어져 있다.

 

무엇보다도 합자의 활용도가 넓어서 별도의 읽기 연습이 많이 필요하다. [ei], [gi], [li], [ri] 그리고 [ti]와 같은 합자가 필수적으로 활용되며, 소리를 구별하는 합자의 역할을 하기도 해서 글자 모양만 놓고 봐도 발음을 알 수 있는 장점이 존재한다.

st 합자 예시

 

특히 [st] 합자는 굉장히 독특하게 설계되었는데, 자세히 보면 [s]가 [t]의 상단부에 연결되어 있으며, 이는 그 다음에 등장하는 서체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또한 이탈리아 남부 바리(Bari) 지역의 서체는 일반적인 베네벤토 서체보다 조금 더 둥글고 장식적이다.

 

[고딕체/Gothic script]

 

Köln, Erzbischöfliche Diözesan- und Dombibliothek, MS 149, f. 52r. / 14세기

 

블랙레터(Blackletter)라고도 불리는 이 서체는 흔히 중세 필사본에서 자주 보일 정도로 익숙한 이미지가 존재하고 있다. 12세기부터 17세기까지 폭넓게 사용되었으며(독일은 20세기까지 쓰임), 흔히 고딕체하면 떠오르는 텍스투라(Textura / 또는Textualis) 양식이 가장 익숙하게 느껴질 것이다. 

 

HMML, Bethune Breviary, MS 2, f. 7r / 13~14세기

 

둥글고 글자 사이에 간격이 넓으면서도 펜의 각도가 완만한 카롤링거 소문자와 다르게 이 고딕체는 글자가 수직으로 길어지는 등 비율 변화가 발생하면서도 펜을 더 각지게 꺾어 쓰며 획의 굵기 대비가 강해지는 등 덕투스(ductus, 필순 및 운필법) 변화가 발생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고딕체는 글자가 좁고 빽빽한 느낌을 주기도 해서 페이지 전체를 봤을 때 여백이 차지하는 면적이 좁아보이게 느껴진다. (검은 면적이 많이 차지해서 블랙레터라고도 불림) 이는 양피지의 사용량을 줄여 비용을 절감하는 실용성도 챙겼다고 보면 된다.

 

중세 중기에는 대학의 발전과 더불어 필사본의 수요가 증대하기 시작하면서 이 시기에 등장한 고딕체의 사용 비중이 높아지게 된것이고, 지금도 고딕체로 남긴 필사본만 해도 엄청난 수를 자랑한다. 

 

고딕하면 가장 떠오르는 텍스투라 양식은 12세기부터 중세 말기, 그 이후까지 북서부 유럽의 보편적인 도서 문화에서 사용되었던 조밀하고 각진 서체를 통틀어서 부르는 명칭으로, 12세기 전반에 걸쳐 대학이 발전하게 됨에 따라 도서 제작의 수요가 급증하게 되면서 이 텍스투라 양식의 활용도도 늘어나게 된다.

 

특히 중세의 대학 교육에서는 본문만큼이나 그에 대한 해석(주석)이 중요했다. 따라서 본문을 가운데 좁게 배치하고, 그 주변을 주석이 둘러싸는 복잡한 레이아웃이 발달했는데, 이를 수용하기 위해 본문 서체인 텍스투라 양식은 더 좁고 조밀해져야만 했다. 그래서 둥글고 간격이 여유로웠던 카롤링거 소문자하고 비교해보면 확연한 차이가 느껴진다. 

 

이 서체는 간격이 짧은 세로 중심의 획으로 촘촘히 구성되는 경우가 많아 말 그대로 미님(minim)의 활용도가 넓어 읽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않는다면, 이 고딕체를 극한으로 활용한 문서를 제대로 읽기가 쉽지 않다. (중세 고문서학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상당한 스트레스를 동반할 듯..)

 

 

위 사진은 고딕체를 활용한 극단적인 문장 예시다. 문장을 전사하면 아래와 같다.

 

mimi numinum niuium minimi munium nimium uini muniminum imminui uiui minimum uolunt

"눈의 신들을 모시는 가장 작은 마임(mime)들은 살아생전 성벽의 포도주를 분배해야 하는 그 커다란 짐이 줄어들기를 전혀 원하지 않는다."

 

이렇듯 고딕체는 수많은 시대를 거쳐 많이 활용되었으며, 지역별로도 다른 형태로 폭넓게 쓰여왔다. 

 

[맺음말]

지금까지 시대별로 중세 필사본에 어떤 서체가 활용되었는지 간단히 살펴봤다. 각자 쓰는 방식이 다르기에 따로 읽는 방법을 확실하게 배워두는 것이 옳다. 다음 포스팅에는 각 서체마다 읽는 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보도록 하겠다.